이순신
내용
이순신은 30세가 넘은 1576년에 무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나섰어요. 하지만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강직한 성품 때문에 승진도 늦고 어려움이 많았어요. 그러다가 이순신은 1590년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의 추천으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가 돼요. 그는 이때 거북선을 만들고 군사들을 훈련시키고 군량미를 확보하며 전쟁에 대비했어요. 1년 만에 강력한 수군을 만들었고, 이듬해인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났어요. 임진왜란은 1592년부터 1598년까지 7년 동안 이어졌어요.
이순신 장군의 수군은 옥포에서 일본 수군과 첫 해전을 벌여 승리를 했어요. 그리고 이어 사천에서 거북선을 처음 사용해 적선을 격파했고, 당포, 당항포, 부산포, 한산도 등 여러 해전에서 승리를 거두며 조선의 바다를 방어했어요.
특히 한산도 대첩은 임진왜란 초기의 중요한 해전 중 하나예요. 좁은 곳을 벗어나 적을 한산도 앞바다까지 유인해서 싸운 전투예요. 이순신 장군은 한산도 앞바다에서 거북선을 앞세워 학익진이라는 전술을 사용해 일본 수군을 크게 무찔렀어요. 학익진은 학이 날개를 펼친 형태로 배를 배치해 적을 포위하는 전술이에요. 이 한산도 대첩은 임진왜란의 전세를 바꾼 결정적인 전투로 평가돼요.
여러 해전에서 연이어 승리한 이순신은 그 전공을 인정받아서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의 수군 전체를 지휘하는 삼도 수군통제사가 되었어요. 그러나 1597년에는 이순신의 전공을 시기한 원균(元均, 1540~1597)과 일본의 흉계로 모함을 받아 감옥에 갇히게 되었어요. 이후 그는 권율 장군 밑에서 직책이 없는 보통 병사로 백의종군했어요. 그런데 그해 삼도 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이 칠천량에서 크게 패해 함선과 군사를 모두 잃고 전사했어요. 이순신은 다시 삼도 수군통제사가 되어 명량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지요.
명량 대첩은 한산도 대첩과 더불어 이순신 장군이 치른 대표적인 해전이에요. 당시 조선은 불리한 상황에서 13척의 배로 130여 척의 일본 배를 상대해 큰 승리를 거두었어요. 울돌목의 거센 물살을 이용해 적의 움직임을 제한하며, 조선 수군은 일본군을 격파했던 것이지요. 수적으로 불리한 싸움이었지만 지리적 특성을 이용한 전략으로 승리할 수 있었어요. 명량 대첩은 압도적인 전력 차이를 극복하고 이순신 장군의 지도력으로 승리를 거둔 전투로 평가돼요.
이후 1598년 노량해전에서 전사했어요.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1월부터 전사하기 직전인 1598년 11월까지 일기를 썼어요. 그것이 『난중일기』지요. 이 일기는 1962년에 국보 제76호로 지정되었고, 전쟁을 지휘하는 장수가 직접 체험하며 보고 들은 사실을 기록한 희귀성을 인정받아 2013년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어요.
이순신 장군은 한산도 대첩과 명량 대첩 등 일본군과 23번 싸워 모두 이겼어요. 거북선은 이러한 승리의 밑거름이 되었어요. 거북선은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에서 주로 사용한 전투용 함선이지요. 거북선의 앞부분에는 용머리 모양의 화포가 설치되어 강력한 공격을 가할 수 있었고, 철판으로 덮인 뾰족한 덮개가 있어 일본군이 쉽게 올라타지 못하게 했어요. 적의 화살과 총탄을 막아낼 수 있도록 튼튼하게 설계되었어요.
이순신 장군은 직접 지휘한 전투는 모두 승리했어요. 그는 임진왜란에서 나라를 구한 영웅으로 숭배되어, 통영 충렬사, 여수 충민사, 아산 현충사 등에 배향되었어요. 그리고 이순신 장군과 관련된 소설, 드라마, 영화, 뮤지컬 등의 다양한 콘텐츠가 끊임없이 생산되어 큰 인기를 얻고 있어요. 또 아산 성웅이순신 축제, 통영 한산대첩 축제, 여수 거북선 축제 등 이순신 장군을 기리기 위한 수많은 지역 축제가 해마다 열리고 있어요.
관련 이미지


출처: <광화문광장 이순신 장군 동상>, 근현대사 아카이브
출처: <이충무공전서거북선>,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출처: <거북선>, 통영한산대첩문화재단
출처: <거북선해진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출처: <국보 이순신 난중일기 및 서간첩 임진장초>, 국가유산청
KR
EN
ES
RU